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조 덴노 (문단 편집) === 아버지에게 승리했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죽다 === 헤이지의 난이 끝난 이후 형식적으로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덴노의 2중 권력 체제가 되었지만,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인세이 측을 지지한 [[카와치 겐지]]가 몰락하면서 아무래도 권력의 추가 니조 덴노 측으로 기울 수 밖에 없어진 바, 니조 덴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키요모리가 점점 세력을 키우며 훗날 [[헤이케]]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니조 덴노가 살아있는 시점까지는 아직 공가의 견제도 있어 권력의 정점까지 키요모리가 오르지는 못했다. 한편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고시라카와 상황은 대신 불교에 심취하여 [[1164년]]에 [[렌게오인]](蓮華王院)이란 절을 창건했는데, 낙성 기념식을 하는 날 아들인 니조 덴노에게 행차와 포상을 요청했지만 니조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이에 고시라카와 상황은 >"아아, 어쩌면 저리도 미울까"(ヤヤ、ナンノニクサニ) 라고 한탄하며 앙심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약 이때 니조 덴노가 고시라카와 상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낙성식에 행차하고 두 부자가 화해하는 기미가 있었다면 이후 역사의 흐름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풍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니조 덴노 측에서는 사찰에 기부된 장원과 소령을 바탕으로 불교의 힘을 빌어 고시라카와 상황이 인세이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니조 덴노의 붕어 이후 고시라카와 상황의 행보로 볼 때 니조 덴노 측의 추측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기도 힘들다. 천황 친정을 꿈꾸던 니죠 덴노는 [[1164년]]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인해 태어난지 겨우 1년이 지난 장남 [[로쿠조 덴노|노부히토]]를 급하게 황태자로 책봉하고, [[1165년]] [[8월 3일]]에 양위했는데, 그로부터 겨우 1개월 가량이 지난 같은 해 [[9월 5일]]에 붕어했다. 헤이지의 난이라는 부자간 권력 쟁탈전에서의 승리도 무색하게 니조 덴노가 향년 22세로 너무 일찍 붕어하게 되면서 헤이지의 난 이후 사실상 권력을 잃었던 고시라카와 상황이 권력 회복을 획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